참 모순이 많이 담긴 말이지만... 독서하기에는 정신없는 사회보단 매일 똑같은 군대가 12배정도 나은 것 같다. 정말 읽고 싶은 책이였는데 한 곳에 앉아 집중적으로 읽지 못해 아쉽지만 오랜만에 '내 생각과 맞는 량서'를 읽어 기분이 좋았다.
냉전체제의 붕괴 이후에 '세계 최강 미국'의 이미지를 부정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않다. 최근 베이징 올림픽과 높은 고성장으로 강국 대열에 올라오고 있는 중국이나 오일머니와 최근 그루지아 사태로 새로운 강자로 떠오르는 러시아가 미국 독주체제를 '다극체제의 세계'로 몰아가려고 노력하고 있지만 베이징 올림픽 이후 어두운 중국의 미래나 아직까지는 미국에 비해 세계적인 입지가 좁은 러시아라 '다극체제'라고 하기에는 섶부른 감이 있다.
즉 싫던 좋던 당분간의 미국의 주도아래 세계의 편제 좌지우지 된다는 말이다. 이 책에서 보여준 미국의 문제점들은 너무 방대하고 다양한 분야라서 거의 짜증이 날 정도였다. 이렇게 문제가 많은 나라가 어떻게 세계의 중심이 되었을까? 무지한 생각이지만 차라리 프랑스나 노르웨이와 같은 국가과 현재 미국의 위치에 있다면 좀 더 이 인류가 평화롭고 모두의 풍요가 이루어지지 않을까 했었다. 다 부질 없는 생각이지만...
책을 보고 더 화가나는 것은 이런 미국사회의 악습과 폐단을 너무나도 착실히 닮아가고 있는 대한민국이다. 미국에 대한 절대적인 의존관계를 어떻게 하면 끊을 수 있을까? 내 생전에 제발 '미국따라가는 대한민국'이 아닌 '대한민국스러운 대한민국' 좀 봤으면 좋겠다. 그래도 미국이 아직 망할때는 아닌가 보다. 이런 자성의 목소리를 내는 똑바른 지식인이 존재하는 것을 보면..
이밖에 많은것들이 우리 인생에 어쩔 수 없음으로 다가온다. 이런 생각을 하던 중 읽은 책이 내가 가장 사랑하는 작가인 황석영 선생님의 '손님'이다.
우리 민족에게 맑스주의와 기독교는 '어쩔 수 없는 것'이다. 맑스주의로 인해 강력한 제국을 완성한 소련의 힘은 우리나라라고 해서 예외적으로 비켜 갈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소련이 아니라도 사회주의 사상이 가져다주는 이론적이 완벽함. 지금의 내가 그 시대의 계급의 서러움에 시달려야만했던 운명으로 태어났다면 그 이론적 완벽함과 이상적 세계관에 매료되었을 것이다. 여튼 우리가 원하지 않았건 원했건 반갑지 않았건 반가워건 우리는 맞이 할 수 밖에 없었다. 우리에게 세계의 흐름을 막을 만한 힘도 의지도 지식조차도 갖추어 진 것이 아무 것도 없었고 오히려 그 것을 동경하는 사람들의 실천력이 민중을 뒤 흔들던 때이다.
기독교 또한 마찬가지이다. 조선은 유학을 지키려했다. 적어도 지배층에서는 자신의 권위와 당시의 행태를 정당화 시켜줄 유학을 끝까지 고수하려했다. 하지만 우리는 뱃길을 열고 들어오는 서구열강이 젓는 힘찬 노를 막을 힘이 없었다. 서구의 소위 말하는 신문물과 함께 신사상, 신세계를 알리고 열어줄 기독교의 책과 사람들이 들어왔다. 가난하고 힘이 없는 백성들이였다. 무지한 백성들이었다. 업악에 짓눌리는 것을 그냥 아버지가 물려준 유전자인 것 처럼 살아온 조선의 백성들이였다. 파란눈의 사람들이 가르쳐주고 인도해준 하느님의 세계는 천국이였다. 가난한 자도 믿음만 있다면 현세는 아니라도 사후세계에서 만큼은 오늘날의 한을 풀수 있다고 기독교를 접한 조선의 백성들은 생각했다.
모두가 맑스주의를 동경하고 기독교를 사랑했다면 그들은 '귀한 손님'의 대접을 받았을 것이다. 하지만 맑스주의는 미국을 선두로하는 자본주의에게, 기독교는 아직 나의 뼈속 깊은 곳에서도 그 힘을 발휘하고 있는 유교적 사상에게 '불청객'의 대우를 피할 수가 없었다. 이러한 상황을 황석영 선생님은 6.25전쟁이라는 우리민족의 뼈 아픈 기억을 통해 그 불청객들이 귀한 손님이 되고 마침내 주인이 되기위해서 우리가 치러야 했던 엄청난 댓가를 솔직하게 담대하게 표현해 놓았다. 누군가 그랬다. 황석영은 시대의 중심에 서 있는 사람이라고. 정말 그의 소설에서는 아차하면 우리가 그냥 아픈 역사와 과거로 취부하고 넘겨 버릴 사실들을 재조명,재해석하는 그의 시대적 성찰에 찬사를 보내고 싶다.
뿐만아니라 문학적인 측면에서도 한국적인 특수 상황을 한국적인 표현으로 나타내었다고 본다. 소설의 구성을 우리민족의 전형 한풀이 놀이인 '황해도 진지노귀굿'의 열두마당을 모태로 한 것이다. 앞에서도 말한 것과 같이 맑스주의와 기독교는 우리에게 '불청객'이다. 그들이 우리의 땅에 정착하고 뿌리를 내리는 과정에서 민족적 한국적 한이 산출되었다. 소설 손님은 민족적이고 한국적인 한을 풀기위해 가장 민족적이고 한국적인 한풀이 방식인 굿의 구성방식을 소설에 옮겨놓으면서 가장 민족적이고 한국적인 소설이된다. 거기다가 이북의 말투를 사용한 상황전개는 현실감을 극에 달하게 하고 눈으로 보여지는 것 보다 더한 생동감을 전한다.
세월이 많이 흐르고 또 변했다. 우리에게는 많은 지식과 힘과 기술이 생겨났다. 지금도 우린 많은 '손님'을 맞이해야한다. 그 중 맑스주의와 기독교 같은 '불청객'은 반드시 존재한다. 아마 미국이 아닌가 싶다. 미국이 우리에게 반갑지 않지만 받아들여야할 손님이라면 난 즐기고 싶다. 피할 수 없다면 즐겨라라는 상투적이 표현이 가장 적합하지 않을까? 우린 미국이 원하는 장단에 신명나게 굿판 한번 벌려주고 당당하게 굿값을 받으면 된다. 그 다음에 뒤도 돌아보지않고 가면 그만아니겠는가?
동양의 고어 중에는 '남아 일어 중천금'이라는 말이 있다. 모두가 잘 알고 있듯이 '대장부는 한마디 한마디를 천금과 같이 무겁게 여긴다.' 이다. 남녀의 유별이 모호해 지고 있는 현대의 상황에서 어디 이 말이 남자에 국한 된 것 이겠는가? 또 일회적이고 순간적인 말이 그리 중하다면 그 것을 기록하여 대대손손 이어지는 글은 얼마나 중하겠는가?
남한산성은 우리의 아픈 역사를 냉철한 시선을 통해 극적으로 승화한 것이다. 그리고 작가는 남한 산성의 인물들을 통해 말과 글의 무서움을 말해 준다고 난 보았다.
김상헌. 지키고 싶었다. 지킬 수 없는 것을 지킬 수 있다고 말했다. 인조에게 지푸라기 같은 썪은 동아줄 같은 희망을 잡아야 한다고 했다.
상헌은 썪은 땅에 위태롭게 홀로 자란 지조의 대나무가 되고 싶었다. 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자기와 뜻을 함께 해주는 이들의 힘을 얻어 애써 자신의 눈을 가리고 귀를 막았다. 현실을 외면 하고 싶었지만. 용골대는 자신의 문앞에 와있었고 칸은 자신의 위에서 자신을 강하게 쏘아보고 있었다. 상헌은 돌리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돌릴 수 없었고 못했다.
상헌을 바라보는 수 많은 눈들. 상헌 했던 말. 그리고 썼던 글. 상헌은 돌릴 수가 없었다.
예판의 글이 뛰어나다는 인조의 말에 상헌은 했던 말들의 겉치레만 다시하여 또 하고 또 하였고 눈물을 흘리며 후세에 비겁한 항복자로 남을 것을 두려워 했다.
최명길. 명길은 현실성 없는 의(義)가 나라를 망친다고 생각했다. 망한 명에게 의(義)를 차린다고 해서 명이 일어나 밥을 주고 돈을 줄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명길은 이(利)를 추구하고 싶었다. 허세와 명분 뿐인 이 썩은 땅에 이(利)의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화친 뿐이라고 명길은 생각했다.
명길은 매국노의 취급을 받으면서도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살아서 문을 열고 나가야 길이 있고 길을 걸어야 훗 날이 있다고 믿었다. 그는 후세에 비겁한 항복자로 남을 것을 뻔히 알았지만 그래서 네 신료와 상헌이 하지 못했던 일을 그는 했다. 그래도 그 속에서 작은 자존심은 지켰다. 사특한 입질과 기름진 붓질로 칸이 원하는 것을 스스로 불게 하였다. 일국의 황제는 명길의 붓질에 격분했고 어린아이처럼 자신이 요구하는 것을 일일히 알려주었다. 결국 명길의 말은 답서의 글이 되었고 그 글은 인조와 조선의길이 되었다.
명길과 상헌. 오늘날 우리와 무엇이 다른가? 아무런 대책도 없이 아무런 힘도 없이 미국을 벗어나려는 사람들. 그렇게 한순간 그들이 말하는 허울에서 벗어나 우리가 얻는 것이 무엇인가? 너무 많은 해결 하기 힘든 문제 점들만 우리들 주변에 산재 할 것이다.
영원히 미국의 도움을 받자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지금 미국에게서 이(利)를 찾아야하고 미국으로부터 이(利)를 추구해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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